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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대니 보이

아이리시 테너라는 청년들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열두 명이 한 줄로 선 듯 앉은 듯 의자에 한쪽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첫 곡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의자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 놓는 스툴이다. 노래하는 이들을 위해 종종 무대 위에 놓이는 의자이긴 한데 우연한 일치로 아이리시 테너를 위한 아일랜드식 소품이 되었나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 위에 걸터 앉아 한껏 폼 잡는 젊고 건장한 남자 테너 열두 명. 조명이 켜지자마자 누구의 인상이 제일 좋은지, 누가 내 스타일인지 빠르게 스캔했다. 진지하게 혹은 예리하게 보거나 이도저도 안 되면 감성에라도 푹 빠져야 리뷰를 쓸텐데, 잠시 딴짓했다. 그런데 그마저 쉽지 않았다. 날로 눈이 침침해져서 스타일 고르는 눈썰미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형편. 덕분에 정신 차리고 귀를 쫑긋했다.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충분히 멋진 테너였다. 그들이 처음 부른 노래는 '대니 보이'. 곡조는 애절하고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래 아닌가. 곡조는 애절하고 감미로웠다. 누가 불러도 그럴 수밖에 없는 노래 아닌가. 역시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노래는 '대니 보이'인가!

일제 강점기 36년만 해도 끔찍한데 800년에 이르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 역사는 어떠했을까? 성인이 되면 당연히 전쟁터로 가는 아들들과 그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던 부모들의 마음을 담은 노래 '대니 보이'는 바로 아일랜드이다. 그 나라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어도 노래 '대니 보이'는 숱한 버전으로 들어봤다. 슬픈 역사와 사연 때문인지 누가 불러도 구슬프다. 대기근으로 국민의 4분의 1이 죽고 척박한 고향을 눈물로 떠난 이민자들만 해도 부지기수. 오랜 식민 통치 아래 아일랜드의 말 게일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그래서 '대니 보이'조차도 증오로 가득한 영어 가사로 부르게 된 아일랜드 사람들. 오랜 세월 끝에 아일랜드는 결국 독립했지만 대니 보이의 멜로디가 처음 발견된 '데리'는 이제 '런던 데리'라는 이름으로 아직 영국령이다. 

꽃들이 시들어 가면 내 아들이 돌아올 거야. 그리고 난 싸늘히 죽어 있어 있겠지. 네가 돌아와 내가 누워 있는 곳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할 테지. 내 곂에 있어 주겠다고…

아이리시 트웰브 테너가 2시간 동안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불렀던 오페라, 팝, 재즈, 칸초네, 뮤지컬 넘버 중 아일랜드 노래는 '대니 보이' 딱 한 곡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처음 왔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흥행가도를 달린다는 소문 그대로 멋진 화음과 화려한 퍼포먼스의 활기찬 무대였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노래로 시작했지만 전반적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개성은 아니었다. 그래도 리뷰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칭찬 위주로 썼다. 틀린 말도 아니고 없는 말도 아닌 감상이었지만, 공연 후 귓가에 맴도는 노래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레파토리보다 '대니 보이'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라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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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작업을 하면서 EBS '지식채널e'를 보며 많이 배운다. 꼬박꼬박 챙겨보고 지난 것까지 다시보기 한다. 그 중 기억에 남는 400화 '대니 보이'편. 돋보이는 수작이고 좋아하는 작품이다. 여러 사람 버전 중에 클로에 에그뉴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택한 건 그녀가 아일랜드 출신 가수이기 때문이었을까? 특유의 곱고 가녀린 목소리 위로 아픈 역사의 장면들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며 감동을 준다.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 노래를 찾아 듣다가 에바 캐시디의 '대니 보이'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바가 이 노래도 리메이크 했었나?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녀인데 왜 몰랐을까? 클로에 에그뉴와 달리 에바는 맑으면서도 거친 허스키로 읊조리듯 토하듯 노래한다. 그래서 좋다. 33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은 그녀의 짧고 아쉬운 삶까지 오버랩 되는 대니 보이. 안그래도 슬픈 노래인데 에바의 목소리까 귀에 맴돌아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