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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고백과 기록 - 헬프

 

영화 예고편 보는 게 취미이자 오락인 딸내미. 개봉하는 영화마다 빠짐없이 극장에서 보는 건 아니지만, 예고편만은 거의 꿰고 있다. 딸내미가 어렸을 때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전부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것들뿐이라 어른인 내겐 때로 곤욕이었다. 영화 선택의 기준이 당연히 아이였으니 보는 영화가 한정적이었다. 지금이야 혼자서도 영화 보러 가기를 즐기고 어른들끼리 보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땐 완전히 어린 딸내미 위주였다. 언제쯤 내 취향대로 영화를 골라보려나 했다. 그런데 아이가 좀 자라서 일단 15세가 넘으니 함께 보는 영화 선택의 폭이 조금 확대되었다. 또래보다 순진하다 못해 천진해서 정신연령도 15세 등급인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이젠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꽤 늘었다.  예고편을 꿰고 있으니 대략의 정보는 나보다 잘 알아서 도리어 녀석에게 묻기까지 한다. 때로는 꼭 볼만한 영화, 지나칠 영화를 판단해서 참고하기도 한다.

 

<헬프> 이 영화도 딸내미를 통해서 알았다. 예고편을 봤을 때 둘 다 똑같이 보고 싶은 영화로 분류했는데 상영하는 극장이 얼마 없었다. 하더라도 하루에 한두 번이고 그 외 시간엔 다른 흥행작 상영으로 돌렸다. 그러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놓쳤다. 어느새 극장에서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 거 같다. 나도 예고편을 통해 괜찮겠다 싶었으나 한편으론 할리우드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는 뻔한 인종차별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못 본 게 좀 아쉽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는데 녀석은 너무나 아까워했다. 그러더니 극장에서 서점으로 방향을 바꾸어 영화보다 책을 먼저 봐야겠다고 매체를 바꿨다. 책을 영화화 한 걸 비교해 보는 것도 녀석의 취미다. 자기가 책을 다 본 후 DVD를 함께 보자고 해서 우린 녀석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영화는 좋았다. 딸내미 말에 의하면 책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원작을 훼손하지 않은 영화라고 평할 수 있단다. 책을 읽지 않은 그이와 난 그러려니 할 수밖에…. 그야 어쨌거나 영화의 런닝 타임이 꽤 길어서 살짝 늘어지기는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재밌고 의미심장했다. 


노예제도는 진작에 사라졌다지만 그에 못지않은 인종차별이 당연시되던 1960년대 미국. 그 안에서 온갖 차별과 무시에도 입 벙긋할 수 없는 흑인 가정부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문제, 관계의 문제, 의식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영화의 핵심이다. 신기한 건 요란하지 않고 질퍽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선동하지 않으면서도 그 문제들이 고스란히 보인다는 거다. 그럴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떤 특출한 영웅이나 누가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악역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평범한 백인과 흑인 아줌마들의 일상을 다루어서라고 여겨진다. 개개인의 삶에 밀착해서 당시 그 마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집중해서 솔직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그 어떤 거대담론을 논하고 주장하느니보다 결과적으로 효과 있었다.
곧 개강할 <이야기너머>의 강좌를 놓고 고민하던 내게 정 국장님은 말씀하셨다. '개념 중심이 아니라 사례 중심으로 글쓰기를 유도하라'고.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글쓰기가 어렵지 않을뿐더러 억지 없는 공감과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거였다. <헬프>의 이야기 방식이 그랬다. 흑인 가정부가 백인의 아기를 키우는 모습, 백인 아줌마들의 우아한 자태와 속물적인 대화가 오가는 티타임, 온갖 멋을 내고 화려한 쇼핑몰을 돌며 하는 백인 여성들의 이야기 주제는 흑인 가정부 몰아낼 궁리, 흑인과 백인 공동으로 쓸 수 없는 화장실, 백인 여성들 사이의 왕따, 남자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여자의 태도 등…. 흑인과 백인이 어울려 사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다소 섬세히 그렸을 뿐인데 당시의 고질적 문제를 정확한 메시지로 던져주었다.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를 결코 무겁지 않게, 심지어 발랄하고 경쾌하게까지 표현했다. 그래서 재밌고 편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찾는 삶의 가치. 그걸 재밌고 따뜻하게 풀어가는 거. 바로 내가 배워야 할 방식이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고루 살아있는 것도 이 영화의 재미다. 크게는 백인과 흑인으로 나뉘어 성향이란 게 있지만 사람 개개인은 또 모두 다른 개성을 가졌다. 그것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중에 관심이 조금 더 가던 이는 역시 글을 쓰는 스키터(엠마 스톤)다. 여느 중산층 백인들이 그렇듯 흑인 가정부의 보살핌 속에 자란 그녀는 20대 초반인데도 집 안으로부터 결혼의 압박에 시달린다.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겉치장에 신경 쓰고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는 여자이지 않아서 인기가 없다. 기자나 작가가 되고 싶던 차에 '자기는 거슬리는데 남들은 신경쓰지 않는 것에 대해 써보라'는 출판사의 권고에 따라 글감을 찾는다. 그러다 고향 마을에서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어떤 사실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던 흑인 가정부들. 그 사회에서 최고의 약자인 그녀들의 가슴 속에 묻힌 이야기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그녀들이 용기를 내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 또한 용기를 내어 진실을 기록한다. 그렇게 용기 있는 고백과 우정으로 만들어낸 책은 소위 '대박' 났다. 그리고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스키터는 르포작가다. 차별과 불만을 말하는 것조차 불법이고 생명에 위협을 받는 시대에,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편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야기를 따뜻한 가슴으로 엮어낸 르포작가. 어쩐지 관심이 가더라니… 젊은 것도, 좋은 글도 부러워서리….


 

<HELP>의 ost. 

 Mary J. Blige <The Living Proof>

 

'살아있는 증거'라...
가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