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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그 시절 그 음악

음악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집에 제법 좋은 오디오가 있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음악과 친했다. 아버지가 동생들은 놔두고 나만 데려가 주신 내 생애 첫 번째 클래식 음악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당시 가장 큰 공연장이던 세종문화회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압도당했고, 공연을 보는 내내 긴장했던 거 같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문화충격이고 확장이었다. 또, 아버지께서 사다 주신 동요와 가곡 테이프 덕분에 또래 중 나만큼 많은 노래(동요와 가곡)를 아는 아이도 없었다. 노래도 웬만큼 잘했었는지(지금은 아니올시다.;;) 국민학교(옛날 사람!) 5학년 때에는 당시 유명한 노래자랑 방송 프로그램이었던 '누가누가 잘하나'에 나가서 상도 받고 방송도 탔다. 그렇게 곱게 자라던 어린이는 조금 자라 사춘기 무렵에 두 번째 문화 충격을 받는다. 우연히 팝을 듣고는 솔깃해졌고, 소위 '고딩'시절엔 하드록과 헤비메탈에 빠졌다. 괴기스럽고 요란한 연주와 고함 같은 노래를 끼고 다녀서 음악과 함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이 되길 기대하셨던 아버지는 당황하셨고 우려 섞인 걱정을 듣기도 했다. 마이마이 카세트로 헤비 메탈을 듣는 것이 유일한 반항심 발로였던 사춘기 시절이었다. 그랬던 록과 메탈이 80년대 후반에 대학생이 되어서는 더 이상 저항과 자유가 아닌 제국주의 매판 문화로 변했다. 클래식도 부르주아 특권 계층의 향유물이었다. 마르크스를 읽으며 계급성을 논하던 청년은 더이상 즐길 수 없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청산해야 할 과거처럼 단절했고, 20대 내내 민중가요 속에 파묻혀 지냈다. 록과 메탈로 부모님을 걱정을 샀던 아이는 팔뚝질 하며 투쟁가를 부르는 청년으로 장르를 옮겼고 부모님의 걱정은 계속 되었다.
혼란의 20대를 지나 안정적 삶의 구축 시기로 들어선 30대에는 클래식이 편했다. 격정의 20대를 지나며 힘들고 고단했던지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클래식은 지루해졌고 재즈가 귀에 들어왔다. 록과 메탈이 이리저리 들이받는 반항이라면 재즈는 저항이되 자유였다. 이태원의 '올댓재즈'에서 라이브 공연을 보았던 것도 그즈음일 것이다. 그러다 40대에 들어서야 클래식의 제맛을 즐긴다고나 할까. 
돌아보니, 음악 취향이 세월과 함께 변했다. 신기하게도 10대, 20대, 30대 그리고 40대별로 좋아한 음악 장르가 다르다. 음악을 좋아했으나 깊이 없이 여러 음악을 전전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힙합과 인디밴드 공연장에서 문득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 시대 가장 신세대적인 힙합과 밴드 음악을 들으며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기웃거리던 옛날을 떠올리는 것이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관객이 대부분 젊은 층이고, 클래식 공연에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리액션을 보이는 딸내미를 보며 불쑥 떠올랐다. 주로 클래식 공연에 함께 갔던 딸내미도 어쩌면 이런 공연을 더 좋아할지 모르겠구나...
생각해보면, 소싯적 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순전히 음악으로 좋아했다기보다 파격적인 표현에 끌렸던 것 같다. 라이브 공연에는 가 본 적 없고 요즘처럼 비디오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디오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다. 가사가 끔찍하고 퇴폐적이라고들 하지만, 힙합의 욕설에 비하면 순박한 느낌이다. 은유적 표현과 이탈적 행위가 도발적 매력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 본 힙합과 밴드 공연은 얌전(?)한 편이었다. 록이 그랬듯 힙합이 원래는 저항 정신을 담고 있고 탄생부터가 길거리 뒷골목이라 거칠고 원색적인 표현이 난무한다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중음악과 결합한 힙합은 원래 힙합의 의미가 퇴색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교적 부드러워져서인지 오늘 공연은 '옛날 사람'으로 봐도 파격적이지는 않았다. 1부 힙합에 이어 편성된 2부 밴드 부문도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그루브와 빠르고 신나는 연주가 조화를 이룬 공연이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젊은 관객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밴드들이란다. 그들 가운데 앉아서 성장기 한때가 잠시 떠올랐다는 것도 나이 든 증거일까?

 


가끔 하드록을 찾아 들을 때가 있다.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나 딥퍼플의 리치 블랙모어, 에릭 클랩튼이나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연주가 속 답답할 때는 최고다. 지금도 레인보우의 '스타게이저'를 들고 있노라면 온몸에 고압 전류가 흐르고 강한 비트의 드럼은 심장을 두들겨 대는 것만 같다. 요즘 애들 말대로 그야말로 '쩐다'. 젊다는 말조차 이른 10대 후반 시절. 그때와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중년에 듣는 하드록에 묘한 향수가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