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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숲의 소리와 향기 - 허니

 


영화<허니>中

 

영화 <허니>. 숲의 향기가 나는 영화였다. 한 남자가 나무에 높이 오르는 첫 장면부터 온몸에 초록 물이 들 것 같았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숲길, 맑은 눈빛의 세 식구가 살던 집, 투박한 나무 식탁, 달그림자가 뜬 양동이, 촉촉한 새벽녘과 어스름한 저녁 무렵 그리고 고요한 밤에도 숲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나뭇잎들이 물결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이 스크린을 가득 메울 때 영화 밖 세상도 온통 그럴 것만 같았다. 낮게 깔리는 음악 한 자락 없이 화면 가득 담은 자연의 풍광이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가득한데 무겁지 않았다. 보여줄 뿐인데 향기를 느낌은 감각의 오류였을까? 영화는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데 보는 동안 그 속으로 한 발, 한 발씩 따라 들어가 마침내 그 숲에 함께 있는 느낌. 그래서 숲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나 보다.


하늘이 높아지고 날씨가 좋아져서 어딘가 여행 가고 싶어 안달이면서 막상 그러지 못하던 참에 영화 한 편으로 숲 여행을 제대로 했다. 토요일 오후,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극장까지 가는 길도 여행 같기는 했다. 주말이라 사람 많고 복잡한데 버스, 전철을 갈아타며 도심을 가로지르는 길은 흙 한 번 밟지 않은 번듯한 도로임에도 산길처럼 힘들었다. 그날따라 온갖 소음, 온갖 냄새가 예민하게 느껴지는 게 도시야말로 헤치고 나가기 어려운 정글같았다. 그래서 영화 속 터키의 아나톨리아 숲의 고요와 자연의 소리가 편안했는지 모르겠다. 바람 소리, 새소리, 비 오는 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발걸음 소리를 들으려면 귀뿐 아니라 마음도 열어야 했던 영화. 화면과 함께 소리에 집중하게 되고 소리는 향기로 감각의 전이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였을까? 스틸컷에 스쳐 지나가듯 짧게 나온 랭보의 시가 가슴에 말뚝처럼 박혔다.

 

여름날의 푸른 밤에는
숲 길을 걷고 있으리
밀 잎에 찔려도 나는
잔 풀을 밝으며 가리라 
- 랭보의 시 '감각', <지옥에서 보낸 한 철>중에서 -
(랭보의 시는 번역마다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매끄럽고 느낌이 잘 살아나는 번역을 찾다찾다가 마땅치않아 … ;;)


감독의 어린 시절 추억이 있기도 한 터키의 아나톨리아 숲은 유럽에 남아있는 마지막 우림지대란다. 울창한 숲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이고 숲은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였단다. 무슨 벌통을 그렇게 높은 나무 위에 설치하나, 터키의 벌들은 참 높은 데서 산다 했는데 그렇게 채집하는 검은 꿀이 터키의 명물이자 전통 특산물이란다. 영화 초반에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꿀을 채집하는 남자는 아이의 아빠 야쿱. 그렇게 먹고 살아야 하는 외딴 마을의 어른들은 숲의 삶이 고단하고 절박했겠지만, 자라는 아이에게 숲은 참으로 좋은 환경인 것 같다.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닮아가는 아이. 비록 말더듬이에다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유수프지만 그 눈과 표정 안에 담긴 수많은 빛깔이 증명한다. 때로는 꿈꾸는 듯, 때로는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빛 속에 오묘한 세계가 담겨있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자연과 인생의 길잡이고 선생인 아빠를 사고로 잃고 나서도 기대어 잘 수 있었던 건 숲 속의 나무. 숲이 어린 유수프의 상처와 아빠의 부재를 감싸 안아줄 거라는 메시지가 분명히 전해지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특이한 것은 음악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전반적으로 말이 별로 없는 영화인데 엔딩 크레딧까지 끝내 음악도 없었다.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영화가 끝나고야 알았다. 영화의 완성이 음악이라는 불문율은 영화 <허니>에 적용되지 않았다. 여백 그 자체로 완성을 보여준 셈이다.

 


두 달에 한 번 모이는 영화 모임 사람들과 함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