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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브람스 데이

또 딴 데로 빠지고 말았다. 지지부진하게 붙들고 있어야 좋은 글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 봐야 눈가 다크써클만 짙어질 뿐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처음에 맘 잡고 앉았을 때 음악회 리뷰 원고를 뚝딱 마치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기는 그른 거 같다. 써야 할 거 놔두고 딴소리 주절거리려 블로그를 열고 말았으니 말이다. 해야 할 일이 쌓였을 때 꼭 이런다. 원고 쓰다가 딴 얘기로 새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써야 할 글의 형식이 내 하고싶은대로가 아니라서 그러겠지만, 마감 없이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글은 한가할 때 차분히 해도 될텐데 말이다. 물론 그때 되면 뭘 쓰려고 했는지 다 잊어버릴 테지만. 그래서 또 눈탱이 툭 불거진 물고기 안면이 되도록 모니터를 째려보며 이것저것 몰아 쓰고 있다. 밀물 썰물 같은 글쓰기 습관이다. ;;

이번엔 브람스 때문이다. 리뷰를 써야 할 음악회가 <위대한 브람스 Great Brahms>라서 온종일 브람스 음악만 듣고 브람스 자료만 읽었다. 음악회의 주인공은 브람스지만 내가 다뤄야 할 내용은 음악 자체보다 공연 관련 기록에 가까운 것이라 공연 외의 음악까지 찾아 듣고 자료를 살펴볼 필요도 없는데, 늘 그렇듯 한 번 빠지면 그 자리가 수렁이다. 점점 잠기게 된다. 이번엔 브람스라는 수렁에 빠져 유튜브로나마 그의 작품을 듣느라 리뷰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정말 이 계절 가을에 잘 어울리는 브람스 아닌가. 누군가는 그를 두고 빛깔로 표현하자면 회색라던데, 처음에는 의아하고 선뜻 동의할 수 없다가 무채색의 튀지 않는 멋스럼을 두고 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차가운 듯 우수 어리면서 세련되고 깍듯한 느낌이 있지만, 한계를 두지 않는 자유로움과 깊은 곳 어디선가 우러나는 푸근함도 있고 또 한편 집시풍의 현란한 기교와 화려함도 있다. 그런 브람스에 푹 빠져서 바이올린 협주곡 하나만 다루면 되는 리뷰를 쓰며 실내악, 가곡, 교향곡을 두루 찾아 듣고 있느라 해야 할 일을 잊은채 좋다.

클래식을 유튜브로 찾아 듣다 보니 관련된 다른 것들도 보게 된다. 제목에 브람스가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프랑수와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아세요…>와 흑백 영화 <Good Bye Again>가 그렇다. 심하게 빠진 곁길이지만 세상의 모든 곁길이 그렇듯 달콤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토요 명화'와 '명화 극장'을 놓치지 않고 챙겨보던 시절, 출연 배우는 화려한데 재미는 별로 없었던 영화였고 어쩐지 좋아지지 않던 프랑스 여류작가 사강을 씹어가며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난 영화를 먼저 보고 나중에 소설을 읽었다. 큰 줄거리로 보면 연상, 연하남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의 흔하디흔한 삼각관계를 다룬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느낌이 전혀 다르다. 프랑수와즈 사강은 이 소설을 고작 스물네 살에 썼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로움과 새로운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서른아홉 살 여인의 심리를 잘 표현했을까? 서른아홉의 이혼녀 폴의 나이를 훌쩍 넘어서 이제야 느껴지는 바가 큰 걸 보면 내 젊음은 나이가 무색한 프랑수와즈 사강의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의문문이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것도 예전엔 애매함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작가의 주도면밀함으로 보인다. 사랑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대답할 수 있을 것도 같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열네 살 연상녀이자 스승의 부인인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를 이해할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한 제목이고, 소설이다. 어쨌든 내게는 '브람스 데이'였던 오늘 하루, 그 제목 때문에 사강의 소설까지 들먹이게 됐다. 영화에 나왔던 교향곡 3번 3악장도 아직도 리플레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의문문을 읽는다면, 나는 말할 수 있다.
"브람스를 좋아해요." 라고.